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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안석(王安石)의 설날<元日>

作者:佚名    文章来历:本站原创    更新时刻:2015-4-7

왕안석(王安石)의 설날<元日>
Bàozhúshēngzhōng yísuì chú Chūnfēngsòngnuǎn rù túsū
爆仗聲中一歲除,春風送暖入屠蘇。
폭죽성중일세제 춘풍송난입도소
Qiānménwànhù tóngtóngrì Zǒngbǎxīntáo huàn jiùfú
千門萬户曈曈日,總把新桃换舊符。
천문만호동동일 총파신도환구부
  폭죽소리 속에 한 해가 가고, 봄바람 따스함이 약술(도소주)에 깃드네. 집집마다 훤히 동이 트면, 모두들 현관에 복사나무 부적을 바꿔 다누나
  지구촌 곳곳에서 행해지는 불꽃놀이 ‘옌화(煙花)’에 비해 ‘비옌파오(鞭炮)’ 즉 폭죽은 중국의 풍물이다. 공기를 가르고 땅 위를 달리며 딱딱 따다닥…… 요란한 굉음과 섬광과 연기를 뿜는 폭죽은 2000여 년의 역사를 가진다. 중국에서 분위기를 띄울 필요가 있는 각종 축제나 기념식에도 등장하지만 섣달그믐날엔 전쟁상태를 방불케 해서 외국인들을 놀라게 한다. 급기야 안전문제와 대기오염 악화를 이유로 근년 대도시 지역에서 금지됐으나 이 유서 깊은 명물이 아주 사라지길 바라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대나무 통 속의 폭발물’이라는 뜻의 이름이 보여주듯 폭죽의 주재료는 중국이 낳은 ‘인류 4대 발명품’의 하나 ‘화약’이다. 본고장에서 주로 공동체의 안녕을 기원하는 제의(祭儀) 및 놀이의 도구로 발전한 화약은 서양에 건너가 가공할 화력의 대포가 되어 19세기 중반 이후 약 100년 ‘서세동점(西勢東漸)’ 역사의 동력이 되었다. 이런 문명사의 아이러니를 전복시키는 의미에서, 21세기 ‘친환경 폭죽’의 개발에 구미 여러 나라의 협력이 더해졌으면 좋겠다는 낭만적인(?) 생각을 해본다.
  이 달의 명시 <설날>은 중국인들의 설 풍경을 소박하고 생생하게 그려낸 칠언절구다. 특히 제1-2구는 중국인들에게 널리 회자되는 명구로 꼽힌다. 묵은 해의 사악한 기운을 쫓아내는 일종의 주술행위인 폭죽, 설날아침 온 식구들이 마시며 새해의 무병을 기원하는 도소주, 이 두 가지는 해가 바뀌는 길목에서 심신을 가다듬는 중요 의례였다. 중국과 한국에 각각 전해지는 옛 기록들의 인용을 종합해보면, 도소주는 섣달 그믐날 몇가지 한약재를 베주머니에 싸서 우물에 담가두었다가 정월초하루 아침 술에 넣어 끓여 식힌 약주를 말한다. 대갓집과 일반 백성, 신분계층 구분 없이 두루 행해졌으며 특이하게 나이 어린 사람부터 마시게 했다. 면역력이 부족할 어린이를 먼저 챙기고 노인의 한 살 더 먹는 부담을 헤아린 배려였다. 한약재를 넣고 끓인 술이니 만큼 식혔다 해도 온기의 흔적을 느낄 수 있을 터, “봄바람 따스함이 도소주에 깃든다”는 번역은 그 점을 염두에 두었다. 또한 ‘한 해가 가고(除)’ ‘따스함이 깃든다(入)’의 연결에서 ‘가고 오는’ 상반된 이미지의 배치가 기교의 운치를 느끼게 한다.

元日

 
  제3-4구에서는 시끌벅적한 밤을 보내고 새해 첫 햇살이 쏟아지는 가운데 집집마다 현관을 단장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복숭아나무 목판에 문신(門神)을 새겨 현관에 거는 도부(桃符)만 언급됐으나 실제는 춘련(春聯, 대구로 된 상서로운 문구)을 바꾸는 것도 아우른다고 봐야 한다. 도교적 냄새가 나는 ‘도부’는 생소하지만 ‘춘련’은 옛날 한국인들에게 친숙한 편이었다. 중화문명권의 주요 일원이었던 한국의 세시풍속이 중국과 겹치는 부분이 많은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조선왕조 말기 대궐 안에서는 섣달그믐 전후해서 연종포(年終砲)라는 이름의 대포를 쏘고 불화살을 날리며 북과 징을 크게 울려 귀신을 쫓는 행사가 있었는가 하면, 20세기 전반만 해도 서울의 골목 골목에서 폭죽놀이가 행해졌다고 한다. 폭죽과 더불어 도소주도 현대 한국인들에게 낯설어진 지 오래다. 그래서 최근 한국의 한 유명 주류업체가 2015년 음력설을 맞아 도소주를 한정 판매한다는 뉴스를 접하자 무조건 반가웠다. 드디어 금년에는 고전시문에서나 접하던 전통 약주를 실제로 맛볼 수 있을지 모른다.
  왕안석(1021-1086)은 작년 1월호에 이어 두 번째 등장이다. 충분한 명분과 의의가 있었음에도 결국 국력을 거덜 낼 정도의 격렬하고 지루한 당쟁을 유발시킨 ‘신법’의 주역 왕안석. 사후 약 1000년 간 ‘냉혹한 외골수 원칙주의자’, ‘독선적 개혁가’로서의 형상이 두드러져 주옥의 시문과 경학에 조예 깊은 명석한 문인의 면모는 상대적으로 저평가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의 재조명도 기존 이미지를 일신시키지는 못한 듯하다. 신법당과의 대립 속에 정치생애가 순탄치 않았던 소식(蘇軾, 1037-1101)이 문인으로서 관료로서 누린 고금의 인기와 크게 비교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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